라캉을 여행하는 잉여를 위한 안내서라캉을 여행하는 잉여를 위한 안내서

Posted at 2011.06.18 19:14 | Posted in 책은곧배게 학술부
종종 주변 잉여들이 라캉과 정신분석학에 대해 물어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난 이 둘을 잘 모르고, 성격상 모르면 찌그러지는 비겁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 모난 성격에도 생존할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근 2년이나 펼쳐진 인터넷에서의 키보드 전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택광으로 대표되는 라캉 옹호파와 아이추판다로 대표되는 '이택광 비판'세력이 왜 그토록 치고 받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전 글에서 설명했다. 여기서는 그동안 펼쳐진 주요 논지에 대한 정리와 내 입장을 더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내가 바라보는 일련의 논쟁 지점은 다음과 같다.

1. (특히 라캉에 기반한) 정신분석학이 얼마나 설명력을 가질 수 있는가?
2. 라캉주의자들이 과학 외의 방법으로 설명력을 확보할 수 없는가? 
부록. 라캉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인가? 
3. 라캉주의가 설명력이 없으면 입 닥치고 있어야 하는가?
4. 이택광에 대한 대중의 반발은 '반지성주의'인가?
5. 문화비평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1. (특히 라캉에 기반한) 정신분석학이 얼마나 설명력을 가질 수 있는가?

답을 내리자면 거의 설명력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윤형의 글쓴이의 가독성과 글쟁이의 밥그릇이라는 글은 뭔가 오해하고 있다. 애초에 (귀찮아서 아이추 뺌) 판다가 주장한 것은 글의 가독성 문제가 아니다. 판다측(?) 주장을 대략 요약하자면…

라캉주의(?) 측에서 이야기하는 글의 논거인 라캉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여타 학문의 과학적 연구에 위배된다는 것. 그리고최소한 이가 허용되려면 타 분야에 대해 강한 설명력을 지녀야 하는데 이가 그다지 튼실치 않다는 것.


‘그럴 듯해 보이는 것’과 ‘그러한 것’의 차이는 크다. 예로 슴가가 큰 언니들 중에서 유독 슴가가 작아 보이는 언니들이 있는데 이는 슴가의 모양새와 입는 옷, 속옷의 보정력에 따라 모양새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 가는 분은 반대로 '슴가가 작은 언니'가 '슴가가 커 보이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빠르겠다.

이미지는 텍스트보다 직관적으로 이해시키는 힘이 크다고 한다


이택광의 라캉에 대한 설명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그러한 것'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라캉이 이야기하는 '거울 단계'는 기존의 과학적 연구 결과를 정반대로 인용하기까지 한 실제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이론적 근거이다. 근거가 잘못되었는데, 그 이론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라캉의 문제는 일단 증거 여하를 떠나서 인용 자체가 엉망진창이라는데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이론인 거울 단계도 쾰러의 거울 실험의 결과를 정반대로 인용한 데서 비롯한 것입니다. (아이추판다)

However, close rhetorical examination shows inaccuracies in his citations about the behaviour of children and chimpanzees in reaction to mirror images. Moreover, the evidential basis that he cites is neither supported by contemporary psychology, nor, more seriously, did it suggest what Lacan was claiming at the time of his writing. (Lacan's Misuse of Psychology Evidence, Rhetoric and the Mirror Stage)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데 한윤형은 뜬금없이 ‘가독성’을 붙들고 이야기한다. 한윤형이 언급한 부분은 아마도 이택광의 글에 대한 비판들 중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식의 반응이 많아서일 듯. 하지만 알렙, 김우재, 판다의 지적질은 이 반응들과는 다른 영역에 속해 있다. '모르겠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가 아니라 '당신이 말하는 주장의 근거가 부족하다니까'에 가까운 것.

그래도 라캉의 설명이 땡긴다고? 반복하자면 '그러한 것'과 '그럴듯한 것'은 다른 거다. 

 만약 같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원덕이거나 카퀴, 난 걸스데이 팬이라서 제대로 보인다


2. 라캉주의자들이 과학 외의 방법으로 설명력을 확보할 수 있는가?

있다. 다만 지금까지의 행보는 뻘짓으로 보일 뿐이다. 

잠시 '설득력'과 '논증'을 구분해서 생각해 보자. '설득력'에 과학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수사에 가깝다. 경제성장 7%, 국민소득 4만 불, 세계 7대 경제강국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에, 아무런 과학은 없지만 많은 이들이 그것에 혹했고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하지만 '논증'은 그 기준이 엄격한지의 차이가 있을 뿐, 과학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들 투성이다. 여기서 과학은 '자연과학'이 아니라 '규준'을 이야기하는 것 - 그러니까 '과학적 방법론'에 가깝다는 - 이다.

허나 과학 외의 방법으로 논증의 확보가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직관이나 축적된 경험에 호소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아무거나 다 지를 수 있는 건 아닌데, 일단 과학이 끼어들기 힘든 분야이어야 한다. 수학이나 논리학은 우리의 감각과 무관한 개념들을 사용하며, 경험적이거나 재현 가능하지도 않다. 이런 놈은 필연적으로 직관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최소한 다른 분야에 적용시킬 때의 유용성을 통해 어느 정도의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예로 한의학의 침술을 들어보자. 침술은 아직까지도 플라시보(僞藥) 효과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과학적으로 검증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수행과정을 거치면 결과가 그럭저럭 나오는 것이다. 즉 경험적으로 어느 정도 검증되었다고 본다면 그 논증이 비과학적일지라도 어느 정도 먹힐 수 있게 마련이다. 

비슷한 예로 '못생긴 여자가 서비스가 좋다'는 각하의 말도 과학과 아무 관계도 없지만 많은 남성들이 공감한다


문제는 경험을 통해 라캉의 설명력을 높이기에는 아예 축적된 경험 자체가 없다. 오히려 근거도 없이 막나가는 주장을 할 뿐이다. 이택광은 조승희의 정신분석을 통해 말한다.

대니 노버스는 치료 관점에 치중한 정신의학이나 에고 심리학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7살짜리 아이를 진찰하는 과정에서 자기 친구심리학자는 기계적 스캐닝이나 약물검사만 할 뿐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황당해했다.중요한 건 그 아이가 무얼 원하는지'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심리학자는 그 아이에게 무엇을 해라고 시키기만 했을 뿐, 그 아이의 말을 들어보려는 노력을 하지않았다고 한다. (중략)

조승희 사건은 이런 '심리치료'의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조승희에게 필요했던 건 정신의학이나 심리치료가 아니라, 정신분석이었다. 그가 정신분석을 받았다면, 그의 공격성은 창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심리학에 대한 편견 (또는 이해부족) 을 기반으로 한다. 판다의 인용을 살펴보자. 

상담자는 듣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상담자는 주의 깊게 듣고, 있는 그대로 내담자를 수용함으로써 신뢰와 지지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러한 동맹 관계가 없으면 많은 내담자들은 변화할 수 없다. - < Scott T. Meier, Susan R. Davis, 이동렬, 유성경 옮김, "상담의 디딤돌", 시그마프레스, 5쪽 >

경청은 기본 면담법 중 가장 먼저 거론될 만 한데, 상담이라는 것은 내담자의 말을 듣는 것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 < 김환, 이장호, "상담면접의 기초", 77쪽 >

 
 
물론 정말로 미국 심리학계 (사실 이택광 라인에서는 이게 상당히 혼란스러운데 정신의학계와 심리학계를 혼용하여 사용하기 때문이다) 에 이택광이 이야기한 문제가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주장하는 자기 자신이 제대로 된 근거를 내놓지도 않으면서 이게 대안이라 이야기하는데 이게 어떻게 '논증'이 될 수 있겠는가? 사업계획서를 쓸 때도 이런 식으로 써서 내면 사장은 커녕 과장에게도 욕 먹는다. 최소한 제대로 된 사례 정도는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적은 표본에 따른 심각한 문제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부록. 이쯤에서 나오는 질문. "라캉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라니까요?" 

이택광의 정신분석학과 문화비평을 들여다보면...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혔지만, 내 입장은 이렇다. 정신분석학은 임상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문제를 근대적 임상의학이라는 협소한 영역에 가둬두는 학문이 아니다. 그래서 임상을 하지 않으면 정신분석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 또한 성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 자체가 기존의 철학적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을 만들어낸 지적 원천들은 다양하다. 데카르트로부터 칸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헤겔, 더 나아가서 비엔나학파와 신칸트주의를 고려하지 않고 정신분석학의 의미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사회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화인류학의 성과에 근거해서 많은 논의들을 펼쳤다. 

사실 내 박사논문 또한 이 문제를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다양한 학자들이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연구들을 많이 내놓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신분석학을 좁은 임상의 틀에 가둬두려는 행위는 랑시에르의 말처럼 정신분석학의 정치성을 거세하는 일에 불과하다. 내가 목표로 삼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정치화이고, 이를 통해 주체에 대한 이론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정신분석학에서 제기하는 주체의 관점에서 분과학문의 성과들을 고찰하고 종합하는 것이지, 정신분석학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배제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분석학은 그 자체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산된 진리를 판독하는 것이다. 진리의 판독이라는 중요한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는 문화비평이 이런 정신분석학의 힘을 빌리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것은 근대과학의 문제라기보다 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인문학 본연의 욕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뭐 문화비평을 위해 정신분석학을 빌리든 말든은 내 문제가 아니고... 그냥 라캉이 과학적으로 좀 틀려도 철학이니까, 혹은 정신분석학이니까 상관 없는지에 대해서만 살짝 알아보고 넘어가자.

철학이라고 맘대로 질러서야 곤란하겠지만 굳이 철학에서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을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사실일테다. 하지만 그 전에 선결 과제가 있다. 최소한 과학을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철학적 정당화의 방법은 잘 모르기에 여기에 대해서는 뭐라하고 싶지 않은데, 어느 學이든 최소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일단 과학적으로 잘못된 근거들은 폐기하고 들어가야 옳다. 자기들이 먼저 온갖 인용을 하고 과학적·경험적으로 논박 가능한 잘못된 근거를 써 놓고서 '철학'임을 주장하는 건 좀 우습지 않은가? 철학은 까임방지권이 아니다.

어떤 학문이건 남의 영역 끼어들기는 좋은 버릇이다. 이른바 '나와바리'를 지키려는 태도는 점점 많은 학문이 통합하고 연계되는 요즘 세상에서 도움이 될 리는 없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남의 학문을 건드리려면 최소한의 이해는 담보해야지, 그것을 곡해하면서까지 자기 학문을 정당화하려 해서야 되겠는가?

근본적 해결책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킬 건 지키고 주장하자


3. 라캉주의가 설명력이 없으면 입 닥치고 있어야 하는가?

떠드는 것은 상관없다. 대한민국은 리승만 정부 이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이다. 말하고나면 조용히 끌려가서 문제일 뿐이지.

저 청년의 순수한 마음을 꺾는 슬픈 장면을 보라...


다만 '학문'의 이름으로 서기에는 좀 모자라 보인다. 지금까지 라캉에 기반한 이야기가 왜 설명능력이 떨어지는지를 이야기했는데, 이가 라캉에 근거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학문'이라고 하기에는 그 정합성이 떨어지는 것 뿐이지, 뭐라고 이야기하든은 그 사람의 자유다. 즉 엄밀함을 갖춰야 하는 것은 학문 내 일이지, 우리같은 민간인이 사적 영역에서 지킬 필요는 없다.

게다가 그 이론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유용하게 써 먹을 수 있는 상황은 종종 등장한다. 아래 철학도님의 글은 라캉의 문제점과 동시에 나름의 유용성(문학비평)을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그들은 프랑스 학계에서는 반죽음 상태입니다. 적어도 현재 상태는 그렇습니다. 그들에 대한 박사 논문은 외국인들, 특히 들뢰즈의 경우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주로 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다른 당대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었는가. 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영문학에서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주목하는 한, 세계가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 특히 한국과 일본 같은 미국의 반식민지에서 미국의 주목에 주목하는 것은 또한 자연스럽다는 것. 실제로 한국에 라깡을 들여온 것은 경희대 영문과 권택영선생이었다는 점. (중략)

이 프랑스 철학의 추종자들은 대개 철학 전공자들이 아니라 문학전공자들입니다. 말한 대로 한국의 철학과에서 프랑스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고, 특히 라깡은 제가 알기로 진태원 선생과 김석 선생이 귀국하기 이전까지 강의된 적 조차 없습니다. 철학과에서 운영되는 세미나 커리큘럼에서 라깡을 다룬다는 말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학교 국문과든 그 과의 세미나 커미큘럼에는 지젝이 있고 라깡이 있더군요. 도대체 번역서도 없는 마당에 뭘 읽는 것인가 싶기는 하지만.



블로그를 열었다 닫았다를 취미로 삼고 있는 알렙 역시 라캉의 유용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글은 이미 사라졌지만 제 마음 속에 살아있어요, 헤헤...

사실 라깡의 통찰은 부분적으로는 매우 유용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미지적인 것(영상계), 문자적인 것(상징계), 그리고 이 둘에 포섭되지 않는 실재계라는 구분 같은 것이 그렇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경우처럼, 라깡 역시 일종의 교조에 대한 숭배와 도그마의 옹호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면서 그러한 약간의 통찰과 불필요한 많은 현학과 무의미한 언사들이 패키지로 주어진다. 흔히 말하는 저열한 비유를 가져다 쓰자면, 고수는 이런 위험을 알기 때문에 그 흠이 잘 드러나지 않고, 하수가 될수록 재앙에 가까워지지만 (데리다와 그 아류들 사이에서도 그랬듯이 말이다). 라깡보다는 라깡을 이용하는 이론가들에게 그나마 더 끌리는 이유가 그래서인데, 자기가 필요한 부분만 가져다 쓰면서 자기 이론을 만드는 사람들이라서 교조적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라깡주의에 경도된 담론들이 다른 담론과 배타적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건 문제일 거다.

 

매일 찌질거리는 저도 고추가 커서 칭찬들었어요, 헤헤헤헤...



라캉이 사이비라고 해도 여기에서부터 통찰을 얻을 수 있고 발전시켜나갈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문제는 오용이다. 즉 상황에 맞게 활용되어야지, 전가의 보도로 활용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윤형이 쓴 라캉 정신분석과 비평의 문제를 인용하자면...

논점을 정리하다 보니 너무 많아서 핵심적인 줄기를 짚어봐야 할 것 같다. 도대체 라캉과 그에 기반한 비평활동을 공격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아이추판다에게 있어 이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아이추판다에게 이 확신은 확고한 것인데, 이것들은 따져보면 좀 안이한 소리들이다.

1) 라캉 이론은 사이비 과학이다.
2) 라캉 이론에 근거한 정치/문화평론은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여기서 1번은 이미 내가 '부록'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맞다고 봐야 한다. 사이비는 '비슷하지만 아닌 것'이고 과학이란 이야기 안 들으려면 잘못된 과학적 근거를 폐기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2번은 좀 애매하다. 1번이 개념과 영역의 문제라면 2번은 실제 세계에서 미치는 영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한윤형의 문제제기를 둘로 나누어 바라보기를 권한다.

2-1. 라캉 이론에 근거한 정치/문화평론은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2-2. 라캉 이론의 오류 수정 없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권하는 행위가 문제가 된다.



한윤형이 내놓은 질문 2-1은 솔직히 모르겠고 별 관심도 없다. 일단 세력도 미미하고 학자층이 세상에 영향 미쳐봐야 얼마나 미칠까 싶은 정도니까. 하지만 2-2는 확실히 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검증이 되지 않은 학문을 아해들에게 알린다면 그 문제점 정도는 인식하면서 알려야 할 것 같은데, 라캉주의자들에게 라캉은 거의 교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학은 '학문 그 자체'를 배우는 것보다 '학문하는 태도'를 배우는 곳인데 말이지.

물론 따지고 보면 학계에서 이런 힘싸움이 작용하지 않는 곳은 없다. 경제학과에서 좌파 경제학이 취급이나 되던가?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현실을 통해 균열이라도 간다. 그런데 라캉의 주장은 애초에 현실 적용능력이 원채 없다보니 무슨 주장을 해도 균열조차 가지 않는다. 즉 '검증 불가능'한 주장을 가지고와서 맹신해버리면 대체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걸 아이들에게 가르친다고? 차라리 '이건 종교에요'를 확실히 드러낸 채플 수업을 듣는 게 맞겠다.

물론 총재님은 진실이습죠, 가석방시켜서 월드컵을 출전시키면 우승도 가능합니다


마무리로 알렙의 글을 다시금 인용한다. 이 글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지만, 그렇다면 나도 뭐 굳이 이야기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겠다.

진짜 문제는 정신분석을 집단적인 이론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구조와 개인을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인데, 구조로부터 개인의 행위를 설명하는 것이나 개인의 이해로부터 집단의 특성으로 넘어가는 것 둘 다 그렇다. 그런데 다른 종류의 이론들이 어떻게든 매개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데 비해 정신분석을 사회 비평으로 확장시키는 이론들은 이 논리적인 비약에 대해 유비 이상의 논리적 정당화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럴 때 정신분석은 원인과 증상을 연결시키는 '인과적'인 과학 이론이 아니라 개인(의 마음)과 사회(혹은 집단적 행위)에서 동일한 구조와 메커니즘을 '읽어 내는' 인문적 해석학으로 변모해 버린다. 사실 이건 매우 편리하고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론 생산 방법이기도 하다. 자, 사회는 개인과 같다(이건 플라톤부터 알고 있던 거지?). 그래서 사회에도 무의식이 있다. 우리가 사회적 관계, 제도라고 부르는 것들이 사회적 행동의 무의식이다. 그래서 그 무의식의 회로는 욕망의 논리를 따른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의도한 행위라고 하더라도 사회의 정신분석을 통해 보면 실은 무의식적으로 이러저러한 것들을 욕망하는 행위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런 식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평론의 생산성'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문학이나 영화 비평과는 달리 (여기엔 작중인물이나 창작자등 '개별적인 인간'들에 대한 것이라는 변명이라도 가능하다) 매개 없이 사회적 현상에 적용되는 정신분석적 설명은 실은 지적으로 부정직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정신분석이 상징을 읽어내는 심오한 해석학으로 변모하는 척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이런 것은 임상의 언어를 빌자면 일종의 진단인데, 그 진단에 맞춰서 적절한 처방이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이 이론이 얼마나 그 진단을 책임질 수 있느냐를 물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말이라면 충분한가?

여기에 더더욱 문제가 되는 몽매주의자 라깡이 결합되면 상황은 더 가관이 된다. 사람들은 이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라깡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라깡을 공부하기 위해 사회 현상을 동원하는 일이 벌어진다. 왜 라깡 이론이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나요? 사회 현상을 라깡의 이론을 통해서 보라. 이건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Begging the question)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니라는 것

 
4. 이택광에 대한 대중의 반발은 '반지성주의'인가?

한 마디로 이택광은 문화비평을 할 때 근거를 찾기보다 끼워맞추는 논리비약이 심각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택광식 해석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여기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이 글을 쓰는 본인은 빠돌이다. 맨날 아이돌이나 보면서 침 흘리며 헤헤거리는 아저씨란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택광이 당최 아이돌에 대해서 뭘 알고 떠드는지 알 길이 없다. 그냥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끼워맞추는 것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윤형은 라캉 정신분석과 비평의 문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를테면 소녀시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택광의 글쓰기의 무의미함을 입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택광이 제시한 질문, (가령) “아저씨들은 왜 소녀시대를 욕망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심리학의 대체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이택광이 쓴 글보다 ‘단순한 가설’은 무한하게 내놓을 수 있다. “그냥.” // “유행이라서” // “유전자는 원래 남자에게 어리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게 하니까?” // “최초의 흥행 이후엔 그냥 자본에 의해 고고씽! 최초로 흥행한 이유는 멜로디를 막 분석해보면 답이 나올 듯?” //  다 좋은데 이 중에서 ‘심리학만으로’ 설명이 된 예시는 하나도 없다. 즉 ‘심리학만으로는’ 이택광이 비평한 대상의 내용을 대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내가 심리학을 ‘까기 위해’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심리학이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그렇게 심리학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서 이런저런 방법론을 활용한 복수의 비평이 나오는 것은 심리학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아이추판다가 하는 것처럼 정신분석담론을 전파하는 지식인들의 글에 나오는 사례 중 심리학적으로 오류임이 입증된 사례를 비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이 오류의 비판만으로 비평 자체를 쓸모없는 일로 만들지는 못할 것 같다.



여기서 한윤형은 살짝 엇나가 있다. 라캉을 차용하는 문화비평을 완전히 폐기할 필요는 없지만, 이택광의 말이 제대로 된 설명력이 있는지의 여부는 전혀 별개이다. 사람이 '설득' 당한다고 해서 그것이 '신뢰할만한 주장'이라고 간주하는 건 무리가 있다. 또 어떠한 주장이 정당화되기 위해서 그보다 더 나은 설명이 굳이 나올 필요는 없다. 설명력이 없음만을 보여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택광식 글쓰기의 문제가 있다. 맘대로 떠드는 건 자유이지만 그것이 당최 설명력이 없다는 것. 대놓고 이야기해서 알지도 못하고, 공부도 안 하고 적당히 끼워맞춘다는 거다. 이택광의 소녀시대, 오빠들의 판타지를 보자. 너무 멋진 글이라 전문인용하겠다.

소녀시대를 볼 때마다 박진영이 죽 쒀서 이수만 줬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뮤직비디오를 보면 더욱 그렇다. 이건 초창기 원더걸스 뮤직비디오 분위기이지 않은가. 배경을 미국으로 옮겨 놓은 이국적 미장센은 현실성을 탈색시키는 장치인데, 이를 통해 소녀시대에 대한 직접적 리비도의 투여를 은폐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게다가 중간에 Brand new sound, one more round, 정말 가사 내용 쩐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 뮤직비디오는 자신의 목적성을 드러낸다. 윤서인보다도 더 '솔직'하다! 이번 뮤직비디오는 이제 '다른' 소녀시대를 선언하고 있다. 이것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소녀시대, 이제 좀 있으면 어른이야.' 

<해리 포터> 시리즈가 다른 판타지 장르와 다른 점은 성장소설의 원리를 판타지에 가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리 포터>는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의 논리에 부합할 수 있었다. 소녀시대가 한국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면, <해리 포터>가 보여줬던 것처럼, '성장'이라는 전형적인 교양소설의 주제를 오늘날 한국적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자기계발 담론으로 적절하게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심장>은 이 '새로운' 성장담론의 일단을 보여주는 토크쇼이다. 이 쇼를 통해 소녀시대나 걸그룹들은 '사연의 세계'를 창조하고, 뮤직비디오는 이 사연의 세계를 '승화'시킨 초자아의 목소리로 귀환하는 것이다. 이 초자아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소녀시대를 다시 즐겨라!"라는 자본주의적 정언명령이다. 

흥미롭게도 이 뮤직비디오에서 '미국'은 마음만 먹으면 이런 소녀시대를 소유할 수 있는 상상적 공간으로 재현된다. 이 공간은 모든 주이상스를 가질 수 있다고 우리가 '믿는' 아버지의 자리이기도 하다. 이 아버지야말로 모든 소녀시대의 멤버들을 독차지할 수 있는 원초적 권력이고, 우리가 제거해버린 금지의 기원이다. 원초적 아버지의 공간을 침범한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자리를 감히 '내'가 차지할 수 없다는 원죄의식을 소녀시대의 뮤직비디오는 불러일으킨다. 소녀시대를 바라보는 '오빠들'의 갈등은 이런 이유 때문에 발생한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소녀시대를 가질 수 있는지를 안다. 하지만 그것을 알기 때문에 소녀시대를 갖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잘 아는 것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금지는 이런 '비굴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오빠들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잠시 긴 글에 지친 여러분을 위해 쉬어가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개인적으로 가독성을 높이는 것은 글쓴이의 책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분야에 따라 아무리 쉽게 써도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한계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예로 지금은 거의 떠나간 김우재가 내게 초파리 연구를 아무리 쉽게 보여준다고 해도 내게는 겉핥기 수준의 이해를 넘지 못한다.

그 경우 제반 지식을 몽땅 글에 드러내놓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글을 읽을 변태는 많지 않다. 그러니 이 부분은 적당히 손을 놓는 게 맞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글과 학계를 상대로 하는 글은 엄연히 한계가 있다. 한국은 그 지식상이 특히 부실한 문제가 있는 것이고.

하지만 이택광의 위 글은 당최 근거가 없는 주장의 향연이다. 이택광을 옹호하는 분들은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반지성주의', '난독증' 등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전혀! 오히려 이해 못 하겠다는 쪽이 정확하게 이 글을 읽었고, 반지성주의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반지성주의를 더욱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들풀님의 전문가의 방언과 대중의 자학을 인용해 보자.

나는 최근 화제가 된 한 글에 대한 논란에서, '단어'만 거론이 되고 논리가 거론되지 않는 것을 매우 희한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필자가 '어려운 단어'를 썼다고 질타하고 성내고 나무랐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이들 용어 탓, 혹은 이 용어들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이 없는 탓이라고 여겼다. 나는 이 점이 놀라웠다. 

내가 보기에 해당 글의 문제는 전문 용어를 썼다는 점이 아니라, 글의 논리가 서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논리에 설득력이 없었다고 해도 된다. 어떻게 표현하든, 문제는 단어가 아니라 논리였다. 문제의 글이 많은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어려운 단어가 출몰해서가 아니라, 합리적 논리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하면, 글에서 돌출하고 있는 개개의 개념 사이에 연결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이 글에서 쓰인 특정 술어나 개념들을 쉬운 말로 바꾸어 놓더라도, 글은 여전히 이해불가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해당 글에 가득 찬 비논리적이고 즉흥적인 진술들의 결함이, 어려운 술어 덕분에 오히려 면책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논리로 보자면, 해당 글의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지만, 표피를 들추면 필자의 '쓰고자 하는 욕망' 이상의 것을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러한 문장들이 일관되거나 합리적인 논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이런 상황을 아주 부드럽게 표현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다. 유로스님의 글은 이러한 점을 제대로 지적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도 원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놀라운 정성으로.



마찬가지로 이 글의 문제점을 지적한 유로스님의 글 이택광, 문화비평, 블로그, 일기를 인용해보겠다. 참고로 링크된 글은 이택광의 분석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인문학이 언제나 모호하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이유는, 실제로 많은 인문학자들이 복잡다단한 세상을 단순명쾌하게 자신의 전공학문의 틀에 맞춰 아무렇게나 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외부 세계의 실제 행동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그들이 배운 학문적인 메커니즘을 어떻게 세계 속에 대입하고 확장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뿐이다. 그래서 인문학자들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실제 사회 속에서 사회를 인식하는 일반적인 사람들(뭐, 이를 대중이라고 불러도 좋다)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간극을 지닐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들은 '대중'을 상대로, '공부'하는 '태도'가 되어있지 않다고 엄숙하게 꾸짖기까지 하는데, 우스울 뿐이다. 

대중은 우매하지 않다. 단지 인문학자들이 말하는 그 인문학적 문화비평이라는게, 실은 그리 단단한 기초 위에 있지 않은 것임을 본능적으로 꿰뚫을 뿐이다. 대중들이 인문학/문화비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어려운 말을 써서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실제로 그 문화비평을 이해했는지 아닌지는 별로 상관이 없다. 그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일단 내 편을 들어주는 것 같이 보이면 일단 호의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일견 비판적인 경우라도, 글의 말미에서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말을 적당히 써가면서 가치를 인정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주기만 하면, 적어도 고깝게만 보진 않는다. 

이글루스에서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은,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글루스에서 글쓰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학문을 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학문을 하기 위해 글을 쓰려 했다면, 적어도 지금의 이런 방식으로 쓰면 안 된다. 그들의 글은 학문적인 글이 갖춰야 할 명확함이나 세밀함, 엄밀함 등을 갖추지 못한 채 관념적인 말 사이를 적당히 미끄러져내리고 있다. 그렇게 쓴 글들은 학자들 개인의 '일기'로서는 기능할지 모르나 다른 '학문하려는 자세가 된 사람들'과 서로 학문적인 소통을 하는데는 턱없이 부족하고 설익은 글일 뿐이다.

태도의 문제는 오히려 학자 블로거들, 소위 블로그로 '학문' 비스무레한 행위가 가능하리라 믿는 블로거들에게 되물어주고 싶다. 그들이 블로그에 올리는 글이, 실제적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의 태도에 입각해, 엄격하게 집필되고 있는지 말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글은 엉망이고, 학문을 하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나태하다. 그저 '열심히 블로그를 운영하는 파워블로거'보다도 더 불성실하다.

 
가뜩이나 긴 글에 인용까지 막 해제껴서 좀 미안하긴 한데 그만큼 이 글들이 이택광의 글이 가지는 문제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문화비평이건 문학비평이건 하고 싶으면 아무나 해도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택광의 글들이 그다지 논리적이지도 않고, 정말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노력조차도 결여되어 있따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대중은 문화에 대해 이택광보다 훨씬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택광의 끼워맞추기 글이 와닿을 리가 없다. 게다가 내용은 없는 주제에 이해하기 힘든 개념들이 꽤 많기 때문에 짜증까지 불러일으킨다.

직장 동료면 이렇게라도 하지...
 

이러니까 대중은 이택광을 거부하는 거다. 단순히 '반지성주의'로 몰만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택광 측의 책임감 문제다. 주장만 늘어놓고 근거가 없는데 왜 이를 받아들이란 말인가? 최소한 틀린 근거라도 있어야 이해하건 말건을 하는데, 이건 이해하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다. 김우재의 아이유는 소녀시대의 주이상스다는 이러한 이택광식 글쓰기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로 보인다. 물론 이 글은 키보드워리어 김우재가 삭제했다(...)


5. 문화비평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는 훼이크고 이 부분은 잠시 미완으로 두고 싶다. 사실 이 글은 벌써 6개월 전에 작성된 글인데 다시 보니 아직 문화비평에 대해 내가 논할 깜냥은 아닌 것 같다. 최대한 근일 안에 쓰고 싶지만 솔직히 앞으로 벌려놓은 일도 많고, 무식이 하늘을 찌르는지라 쪽팔려서 못 쓸 것 같다. 단지 내가 이런저런 관심은 꽤 있는지라, 혹시 관심 있는 사람들은 같이 모임이라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진심이다! 홍성일 횽이 끼워주려나 ㅋㅋㅋ)

혹시라도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분이 있다면 참 고마운 일이다. 난 남이 내 글 읽는 말든 신경 안 쓰는 스타일이지만, 글을 난잡하게 쓰기로 유명한 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정말 힘든 일이었을테니까. 여하튼 5번 문제에 대해 논하는 건 뒤로 미루고 지금까지의 관전기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남기겠다.

이택광 : 남의 말 좀 들으삼. 들으려면 진작에 들었겠지만... ㅋㅋㅋ
한윤형 : 나 한윤형씨 글 좋아해서 책도 샀음. 그런데 이 쪽에 오면 왜 그런지 모르겠(...) ㅋㅋㅋ
아이추판다 : 나 판다씨 좋아하니까 끝까지 싸우삼... 이라고 하고 싶지만 더 생산적 글이나 쓰는 게 ㅋㅋㅋ
알렙 : 언제나 적절한 지적질을 해 주셔서 감사... ㅋㅋㅋ
김우재 : 초파리옹, 언제 돌아올 거임? ㅋㅋㅋ
저련 : 언제쯤 이 인간이 쓴 글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추임새는 언제나 ㅋㅋㅋ



사실 내가 걱정하는 건 이택광이 어쩌고보다도 진보계가 점점 이 쪽 계열 필자들을 좋아한다는 거다. 필자가 그렇게 없나? 블로그만 둘러봐도 진보계가 좋아하는 몇몇 필자들... 뭐 예를 들자면 이택광, 김현진, 박가분... 등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날카로운 지적질이 넘친다. 종종 디씨에서도 발견된다. 왜 그렇게까지 '필진의 성(城)'을 쌓고 좋은 필진을 섭외할 생각을 하지 않는 건가? 콘텐츠의 질보다 정치적 성향과 이너서클이 중시되는 건 정말이지, 답답한 일이다. 물론 그 누군가들은 신나하겠지만.


야~ 신난다~~~


최종후기... 아... 다 쓰고 나니까 속시원하기는 커녕 개뻘짓한 느낌이다. 내가 6개월 전에는 이런 글을 쓸 정도로 잉여력이 넘치는 인간이었구나. 요 몇 년 동안 아무리 일이 많고 바빠도, 한 달에 5권 정도씩은 책을 읽고 살았는데, 최근 10년만에 2개월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대한민국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그냥 뭐랄까... 요즘 사는 게 좀 팍팍해요. 누구 나한테 술 좀 사줘. 헤헤헤...


그러니까... 넌 입 닥치고 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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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 읽었다능. 짤방이 끝까지 읽는 힘을 줬다능.
  2. 술 먹은 다음날 긴 글을 읽으면 머리가 아프군요. =_=
    머리가 아프지만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3. '이미지는 텍스트보다 직관적으로 이해시키는 힘이 크다고 한다'
    단, 이승환님처럼 텍스트에 걸맞은 이미지를 골라내는 능력이 하늘을 찌를 때.
    너무 재밌어요. :)
  4. 잘 읽었습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고 다 이해하지는 못 했지만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이런글은 왠지 읽는이로 하여금 피 끓는 오기와 묘한 승부욕을 자극하므로... 이글을 보면 요즘의 블로그 포스트들이 뭔가 짧고 쉽고 간결할 것에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처럼 재미있네요.) 완독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어 숨이 막힐지경이네요.
  5. Noname
    이거 공감합니다. 이택광 씨는 라캉에 대해 비판만 들어오면 '반지성주의'의 발로라고 떠들기만 하지 제대로 된 반박을 하는 꼴을 못 봤습니다. 그뿐이면 말을 않겠는데 심지어는 '라캉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야말로 라캉의 이론이 그들의 무의식을 건드렸음을 방증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나와버리니 이건 뭐…….

    개인적으로 저 논쟁을 거의 초창기 때부터 지켜봤는데(아이추판다, 한윤형, 노정태 씨가 싸울 때부터) 그때부터 구도가 하나도 바뀌질 않더군요. 맨날 '라캉은 인문학이니까' 운운, '반지성주의' 운운. 이젠 오히려 이택광 씨 글 못 알아먹겠다는 사람이 더 짜증나요. "거봐! 역시 반지성주의!"라고 면피할 빌미를 자꾸 준단 말이죠.

    늘 하던 갑론을박이 떠드는 사람과 들이미는 학자들 이름만 바뀌면서 쳇바퀴 도는 것 같아 이젠 아주 관심을 끊어버릴까 합니다.
    • 2011.06.21 22:33 신고 [Edit/Del]
      저도 아마 더 이상 논쟁에 끼지 않을 것 같... 지만 이미 키워질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대단한 잉여인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픈 욕망이 듭니다.
      역시 저는 병신인가 봅니다(...)
  6. 이야~~ 좋은 글이넹...
    물론 짤방만 봤습니다만..
  7. 시시
    ㅎㅎ 글 잘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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