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 만남편소개팅 - 만남편

Posted at 2006. 7. 19. 20:56 | Posted in 수령님 생활일지

* 2년전에 쓴 글입니다

몇 주 전 대학 시절 활동하던 학회 모임이 있어 참석한 적이 있다. 거기서 망년회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강력하게 크리스마스, 혹은 이브에 망년회를 가지자고 주장했다. 몇몇 버림받은 인간들이 나의 의견에 동의를 표시했지만 한 마디에 완전히 묵살당할 수 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할 일 없는 사람은 다른 날에도 할 일 없어. 그냥 부르면 나와."

크리스마스를 회상해 본다. 남정네들과 비디오방에서 슬픔을 달래던 시절, 마치 계엄령이라도 내린 양 집에 꼭꼭 숨었던 시절, 실직한 40대 아저씨마냥 혼자 슬롯머신을 돌리던 시절. 그랬던 시절.

난 그 날을 더 이상 남정네들과 보내고 싶지 않다. 방문닫고 팔의 근력을 키우고 싶지도 않다. 모텔비가 두 배다, 따위의 변명을 일삼고 싶지도 않다.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기를 기대하고 싶지도 않고 제2의 노아의 방주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싶지도 않다.

우여곡절이라고는 전혀 없고 우연찮게 지인이 여자를 소개해 준댄다. 원래 '남자가 소개시켜 주는 자리 여자가 나서지 말 것이며, 여자가 소개시켜 주는 자리에 남자가 나서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지만 이미 굶주릴대로 굶주려 치마만 두르면, 다리만 미끈하면 XX 염색체로 보이는 내게 그런 불문율은 더 이상 작용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굴레를 깨며 성장한다. 나는 이 결정을 내리는 순간 새로운 존재로 탄생하였다.

허나 내 계획대로 일은 이뤄지지 않았다. 워낙에 인기가 많은 (남정네에게 한한다는 것은 천추의 한이지만) 나는 이런저런 약속에 얽히고 섥혔고 상대방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약속이 얽히고 섥혔단다. 그래서 결국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관습상 '무기한' 은 '단기간' 을 의미한다. 귀 좀 큰 보통 사람은 무기징역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아침 햇살을 누리셨고 육사를 나오신 대머리 선생님은 아예 사형 선고를 당하고도 잘 나오시지 않았는가? 물론 재산이 29만원 뿐이기에 생을 연명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겠지만 말이다.

나 역시 대한민국 국민이고 관습을 존중한다. 나는 관습에 따라 무기한을 최단기한으로 바꾸고자 노력했고 결국 약속은 겨우 3일 연기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약속이 당일날 정해지며 내게는 큰 부담이 안겼다. 여자를 만나려거든 3일간 목욕재계를 하라는 성인들의 말씀을 옥석과 같이 새겨야 하건만 전날 알콜 흡수와 부족한 수면으로 인해 가뜩이나 지저분한 얼굴의 모공은 두 배요, 색은 울긋불긋 꽃대궐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남의 이목 신경 안 쓰는 (반대로 남들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나의 외모이지만 이 날만큼은 양심이 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어쩌면 나의 2세와도 관련있지 않겠는가?

일단 회사를 퇴근하자마자 기숙사로 뛰쳐들어와 머리를 박박 감았다. 행여나 비듬 하나 있을까봐 정성을 기울여 한가닥 한가닥을 다듬었다. 드라이기가 없기에 혼다의 백열장수를 연상할만한 손놀림으로 수건을 놀려 머리를 말린 후 왁스를 붙였다. 왠만하면 머리를 다듬었다고 하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그런 표현을 쓸 머리 상태가 아니었다.

지하철에서 볼 책 한 권을 가방에 집어넣고는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난 약속시간은 죽어도 늦지 않는 편이지만 시간을 보니 처음부터 늦을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전화로 늦은 사람이 밥 사기라는 농담을 걸어 두었는데 내가 정말 미쳤다는 생각이 팍팍 들었다. 하지만 운 좋게 열차를 빨리 잡을 수 있어 약속시간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듯 했다. 그러나 정작 상대방은 약속시간을 무려 20분 가까이 오버했다. 그리고도 어쩐 이유에서인지 서로가 누군지 모르고 5분가량을 헤매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난.

브라보... 이건 리버 대박이다. 스캐럽이 터지며 한 부대의 SCV가 한 줌의 재로 남는 그 순간의 느낌. 만약 온게임넷 전용준 캐스터가 해설을 하고 있었다면 정말 난리를 쳤을 것이다. "아아아아아~~~~~~ 이건 대박 중의 대박입니다! 오늘 이승환 선수! 되는 날이에요!!!" 옆에서 김동수 해설위원이 추임새를 넣어 주겠지. "야, 이런 건 정말 일어나기 힘든데 말이에요. 저건 그냥 리버가 아니고 영웅 리버에요!"

인간은 오직 자신의 세계에 비추어 세상을 바라본다고 했던가? 갑자기 날 둘러싼 기계적인 공간과 익명적인 사람들은 따뜻한 보금자리와 인격체로 변화했다. 이건 A다! (가슴 사이즈가 아니고...) A! 대학 다니면서 몇 번이나 손에 쥐어 본 학점이었던가? 한 번 받으면 몇 번이나 출력해서 이게 진짜인지 확인하고 교수에게 전화까지 하며 재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 A가 내 앞에 있다. 그것도 단지 종이조각이 아닌 한 명의 인간이!

외모 이상의 센스는 날 뒤흔들기 충분했다. 일단 '머리를 묶었다' 난 대통령이 되면 계엄령을 내려 모든 여자들이 머리를 묶어야 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몇 번이나 공언한 인간일만큼 묶은 머리를 사랑한다. 외관적으로 좋을 뿐 아니라 그 밴드 부분을 만지작거리는 느낌은 정말 유체이탈, 혹은 종교적 합일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가공할 느낌을 내게 준다. 어디 머리 뿐인가? 옷! 옷! 옷! 옷! 옷에 그려진 세 마리의 어여쁜 곰은 둔탱이 테디 베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큐트함을 주변에 내뿜고 있었다. 그 중 한 마리는 입체감있게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것이 결코 옷의 조화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나머지 두 마리를 더욱 돋보이게까지 했다.

...라는 생각이 3초동안 들었다.

이성을 되찾은 나는 억지로 깐 목소리로 인사를 하려 했으나 알콜에 의해 막힌 코가 그것을 방해할 듯해서 결국 평소 목소리로 나가게 되었다. 어여어여 인사를 하고 상대방의 표정을 파악했다.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불과 수 초, 그 안에 상대방의 감성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명확한 대처법을 연구해야 한다. 절대 그녀의 외모에 홀려서는 안 된다. 오직 관찰력, 처절한 이론적인 이성에 의거해 나의 삶을 발전적으로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결국 나는 식당에 와 있었다. 마치 짧은 꿈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이야기를 펼쳐나가기로 했다. 그래, 모든 것은 솔직하게. 래리 킹도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솔직함'이라 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난 상대가 오체불만족이 아닌 한 외모로 승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겐 그것을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의... (생략... 제길... 정작 쓰려고 하니 아무것도 없잖아 -_-)

여튼 그녀는 정말 예뻤다. 얼굴도 동안이었고 이목구비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키는 167로 그야말로 베스트, 살은 슈퍼모델처럼 뼈다귀도 아니고 통통하지도 않은 충분히 예쁜 몸이었다. 한 눈에 봐도 정말 꽤나 인기 있을 것 같은 여자였다. 거기다가 표정들은 어찌나 귀여운지 본인도 자기는 무표정할 때만 아니면 다 예쁘다고 말할 정도였다.

전라도 출신인데 말투는 오히려 충청도에 조금 가까웠다. 한 마디로 매력없었지만 뭐 그런거 따질만큼 난 청각이 발달하지도 않았다. 레스토랑에 가서 적당히 음식을 시켰다. 만원이 넘는 것이라 내가 사기로 한 것을 엄청 후회했다. 눈물 감추느라 죽는 줄 알았다. 뭐 저 정도 여자라면 분명 만원은 아깝지 않다. 이만원쯤 되면 생각해 봐야겠지만... 이것도 미래를 위한 투자라 생각하면 참을 수 있다. 참을 수 있다. 참을 수 있다... 고 자기 최면을 걸었지만 실패했다.

  1. 엘윙
    오오 흥미진진하군요. (지금의 여친? -_-?)
  2. 그럴수도 있군요. 흥미진진.. 다음편이 기다려 집니다.
    (왠지 불안한 마음은 왜일까.. -_-)
  3. 24
    조낸 재밌슴다!!
    어서 다음 편을!!!!
    플리즈~
    • 2006.07.20 17:32 [Edit/Del]
      24가 참 다양하게 해석이 됩니다. 일단 앞에 20이 좀 그러하다보니 -_-
      어쨌든 글이야 퍼면 되는거니 매일 올리겠습니다...
  4. 흥미진진...ㅋㅋㅋㅋ
    기대기대기대!ㅋ
  5. 24
    훈련병 때 제 번호였는디..
    제대 후 동기 홈피서 놀다가.. 닉네임이 24로 굳어져 버렸... -_-
  6. 은하
    무지하게 예쁘고 자뻑이 심한 그녀;;;;ㅋㅋㅋ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