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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님 정상인모드

20대 청년 시대를 마감하며

드디어 이사갔다. 2000년 이후 11번째 이사인 듯. 사무실 겸용인지라 혼자서 쓰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곳 중에서 가장 쓸만한 집이라 꽤 마음에 든다.

관리인 자리, 주 역할은 벨이 울리면 누가 왔는지 인터폰으로 확인하는 거(...)
칠판 뒤에는 거울이 있는데 관리인님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의미(...)


주방 풍경. 저기 안마의자를 넣을 계획이라는데(...)


주방장 자리, 저기서 의자를 90도만 꺾으면 바로 주방...


회장님 자리, 유일하게 사방이 막혀 있는데다 고급 벽지를 사용하고 있다 
보다보면 뭔가 히키고모리스럽기도...


여기가 내 자리, 뭔가 이상한 화분이 있는 게 고인의 명복(...) 스럽지만 TV 세팅 예정.
사무실 형님이 40인치를 기증하겠다고 함 -_-v


여하튼 이렇게 이사는 완료되었다. 신용산 근처라 강남까지 금방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마음에 든다. 대신 신촌과 종로는 좀 더 멀어진 듯. 뭐 어차피 만나는 사람들이 죄다 나이 그득한 아저씨들이라 강남으로만 불러내서...

이사를 앞두고 며칠 전부터 기분이 무진장 꿀꿀했다. 한 10년 전부터 모아 온 각종 편지와 선물을 이제서야 싸그리 정리했다. 뭔가 미안하고 고맙고 해서 그냥 놔뒀는데 더 이상 짊어지고 있어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혹시나 쓸만한 거 없나 해서-_- 조용히 챙길 것 없나 뒤지다가 글자 몇 자 눈에 들어오는데 눈물이 질질질(...) 인지라 그냥 조용히 분서갱유했다. 되새겨봐야 후회만 잔뜩 생길 것 같고, 후회한다고 돌아오는 것도 없을 것 같아서...

돌아보면 20대는 꽤나 골 때리는 10년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온갖 알바를 해댔고, 그것도 귀찮을 때는 안주 값이 없다고 회기역까지 가서 헌혈하는 병맛나는 가난을 씹었고, 내 돈 안 들이고 외국 나가는 이상한 프로그램을 찾아 헤매며 수 차례 국가망신에 기여하기도 했고, 1주일에 이틀 수업을 나가는 주2파의 위용을 달성하기도 했고, 블로거들과 신기한 모의작당도 해 보고, 없는 돈으로 책은 열심히 사모으며 지적 된장질도 즐겼고, 회사에서는 민폐 열심히 끼치다가 개처럼 일하며 멍멍깽깽거리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동정심 자극에는 성공했는지 신기하게 옆에 여인네는 거의 항상 있었던 것 같고(...) 어찌 보면 깨져버린 약속들로 가득한 20대이지만 상대적으로 이 정도면 훌륭한 20대가 아니었나 생각도 든다.

이렇게 대충 늦은 20대가 마무리지어졌다. 배짱과 객기로 가득찬, 물질적으로는 빈곤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사치스러운 10년이었다. 더욱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10년이 되기를 기원하며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도움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어쨌든 10년간 나름대로 잘 살아온 내 자신에게도 감사드린다. 신이 있다면 신에게도 조금은 감사드린다. 헌금이 필요하다면 낼 용의도 있으니 앞으로도 심심치 않게 기적이나 종종 일으켜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