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와 나블로그와 나

Posted at 2008. 3. 13. 19:52 | Posted in 수령님 사상전집
사실 이 곳에 와서 되도록 한국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는데 도저히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hanrss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수십개의 블로그로부터 수집된 글을 읽자 좀 속이 풀리는 것 같다. 예전 중국 생활 때 머리 속에 지식이 들어오지 않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일부러 한국 책을 좀 가져갔는데 인터넷에서 얻는 정보와는 내 안을 채우는 부분이 완전히 다르다. 물론 대개의 책에 들어 있는 지식은 웹에서 얻는 것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 같은 자료라 해도 좀 더 정제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에는 웹에 존재하는 신속성, 시사성, 상호교류 등이 들어 있지 않다. 모든 지식은 단순히 알기 위한 것에 그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다른 형태로 변용, 재창조되어 활용될 때 그 가치를 지닌다. 비록 그 정밀도는 떨어질지언정 끝없이 요동하고 뒤섞이는 공간인 웹의 중요성은 내 삶에서 어느새 책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내가 블로그를 하면서 얻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많다. 예전에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가치가 뛰어나지는 않을지라도 (시간 투자 대비 효용에서 떨어질지라도) '주관적'으로 소중한 공간이라고만 여겼는데 단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가장 큰 소득은 이전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만큼 넓은 세계와 접하게 된 것이다. 교과서와 삶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심지어 엄밀한 통계 조사를 거친 결론마저도 그 구체적인 개별성을 표현해내지 못한다. 단지 표본이라는 이름 하에 뭉뚱그려질 뿐이다.

오프라인에서는 이러한 개별적인 존재들의 개성을 강하게 느끼며 그들과 교류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주변에 있는 이들이 당신의 삶과 얼마나 먼 존재라 생각하는가? 앤소니 기든스는 그의 사회학 교과서에서 자신의 책을 보고 있는 이는 아마 백인 프로테스탄트 대학생일거라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는 놀라운 확률로 일치한다고 한다. 실제로 내 주변 사람들도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많음을 느낀 곳이 모두 일치한다. 바로 군대. 주변에 아는 여자가 얼마 없어서 여자는 어떤지 잘 모르겠다만.

더군다나 어찌 된건지 내가 교류하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분들은 이상하리만큼 수준이 높고 훌륭한 분들이 많다. 나름 괴리감 형성 가능성도 있는지라 열거야 않겠지만 어찌 현실 세계에서 일개 학생쓰레기이 이런 이들과 교류할 기회를 얻겠는가? 물론 내가 좀 제정신이 아닌지라 그냥 뜬금없이 누구 좀 만납시다, 하면서 연락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이는 대개 일회성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이에 반하면 블로깅은 계속해서 자신의 모습을 내비치는 도구이다. 만남은 단순한 teaching으로 끝날 수 있으나 블로깅은 자연스럽게 mentoring을 제공해준다. 최소한의 돈과 시간으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자기 수양을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자기계발도구는 없을 테다. 물론 예전
용호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블로그만으로 누군가를 파악하고 그 사람의 전문지식과 삶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데 한계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블로그가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데까지의 좋은 가교일 뿐 아니라 더 효율적으로 지식과 경험을 직접 전달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것 역시 사실이다.

사실 블로그를 하면서 내 자신의 세계관도 상당히 영향을 받았다. 우선 웹의 세계를 만나게 되었으며 부족하나마 여기에 대해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장래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나는 어떠한 특정 직업을 선호하기 앞서 그것을 통해 무엇을 실현하려는지를 중시하는 쪽이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더 많은 지식을 대중에게 보급하고 더 많은 지식을 활용해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음으로 더 좋은 세상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는 것이다. 물론 굳이 남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러한 자기실현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내 관심은 학계나 언론계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떤 경우이건 두 가지 한계에 부딪히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 하나는 어찌 되었든 조직에 묶여야만 한다는 것, 좋건 싫건 한국 언론은 언론인들조차 반수 이상이 신뢰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형편이며 학계 사람들은 스스로 정치계 다음으로 지저분하다고 자조한다. 또 하나의 한계는 어디까지나 1인의 힘으로 컨텐츠를 생산한다는 것.

그런데 블로그는 그 컨텐츠가 얼마나 형편없건 (나도 내 블로그가 얼마나 싸구려인지는 안다) 적어도 완전히 under my control 이다. 적어도 남이 뭐라고 하는 것에 신경쓰지 않고 운영되는 나만의 미디어인 셈이다. 이를 통해 어떠한 제약이 있다면 아무리 큰 노력을 들여도 좋은 컨텐츠는 생산할 수 없음을 체감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타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정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존 일부 소수의 손에서 노는 언론, 지식에 비해 그 정밀도가 떨어진다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jean님이 운영하는
planet size brain이라는 블로그 이름을 보면 자연히 드는 생각이지만 웹은 더 이상 소수의 인간들만이 좋은 정보를 생산해내는 시대를 거부하고 있다. 굳이 집단의 이익에 얽매인 컨텐츠를 혼자 힘으로 생산하기보다는 타인이 올바른 가치에 준해 컨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터'를 내놓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면 이 쪽이 좀 더 생산적인 방향이 아닐까 한다.

사실 사람들에게 쉽사리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내 희망 분야와 관심사는 점점 연구, 취재하며 특정 이슈에 대한 컨텐츠를 생산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더 좋은 컨텐츠를 생산할 수 있게끔 하는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물론 문과생이라 장래에 이러한 일을 하기란 어지간히 힘든 일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전에
상하이신님은 기획 등 분야는 오히려 창의성이 더 중요하다 했지만 설마 면전에 대놓고 저주를 퍼붓겠나 -_-) 물론 가치에 준한 방향은 흔들려서는 안 되겠지만 굳이 어떠한 한 직종, 직업만이 행복하고 올바른 삶을 도모하지 않는다 생각하는지라 얼마든지 다른 길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현재 내가 이 길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이를 위해 준비도 해 나갈 생각이다. 여기에 도움이 되는 조언이라면 무엇이라도 환영이다.
  1. 제가 미국에 있을 때랑 비슷한 생각을 하셨군요. 저도 인터넷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갔다가, 어느 날엔가에 RSS에 쌓여있던 100여개가 넘는 글을 다 보고 있는 저를 발견한 적이 잇지요. ㅎㅎ

    승환님 정도의 열정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보니 덧글은 처음 달아보나요? :)
  2. intherye
    깊이 공감하면서 읽었는데요, 저기 근데 planet size brain이란 이름을 들으면 보통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무래도 안드로이드 마빈일 거라고 봅니다;;;

    http://en.wikipedia.org/wiki/Marvin_the_Paranoid_Android
    • 2008.03.15 15:41 신고 [Edit/Del]
      안드로이드 마빈은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부연 설명 부탁드립니다.
    • intherye
      2008.03.17 18:28 [Edit/Del]
      에, 그러니까 마빈은, 라디오드라마로 시작해서 소설, 영화 등으로 전지구적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 캐릭터입니다.

      "플래닛 사이즈 브레인"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찌질이 주인공들의 허접 심부름이나 해야 하는 신세를 한탄하는 초우울한 캐릭터로 소개됩니다. 심지어 마빈과 대화를 몇 마디 나눈 우주선 컴퓨터가 자살해버릴 정도.
    • 2008.03.18 15:23 신고 [Edit/Del]
      아, 바로 그 소설에 등장하는 놈이었군요, 한 번 보기는 해야 하는데 게을러서리 -_-ㅋ
  3. 그냥 하던대로 사는게 좋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이라 잖아요.
    지금의 승환님도 어떤 의미에서는 충분히 생산적입니다.
    • 2008.03.15 15:43 신고 [Edit/Del]
      확실히 너무 빠르게 뭔가를 바꿈은 되려 다른 문제를 생산할 수도 있겠군요. 너무 엉뚱하게 빠지지 않도록 흐름을 잘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4. "이분 블로그 rss등록해두길 잘 했다"라는 생각이 들도록 한 포스팅이었습니다!
    (저도 덧글 첨 달아보는 것 같아요. ^^;)
  5. 톰보이
    블로그를 통해 확실히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더군요. 그건 요즘 유행 혹은 화두인 '블로그로 돈 벌 수 있다'라는 측면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구요. '일개 학생'이신 승환님의 포스트로 많은 것을 얻고 느끼고 갑니다. :D
    • 2008.03.15 15:46 신고 [Edit/Del]
      돈 버는 것은 좋지만 그게 남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도움이 되는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신비주의를...
  6. 원하시던 덧글은 아닐지 모르지만, 수령님(?)의 블로그는 유쾌한 것이 참 맘에 듭니다. 하하.
  7. 헉~ 여기 팀블로그였나봐요.-_-(죄송!)
  8. 승환님의 시각과 글이라면 직접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염두에 두시는 기획(맞나요?)일도 독특한 시각 없인 힘들다는 점에서 승환님과 잘 맞을 것같아요. 건투를 빕니다!
  9. in the rye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지만, 깊이 공감하게 되는 글이네요. : )
    멋진 기획자가 되시길 기대해봅니다.
    (이런 뻔한 덕담이라니... )

    추.
    예전에 '새글로'(댓글로 이렇게 남겼잖아요)는 새로운 글을 트랙백하겠다는 의미였는데.. ^ ^;
    제가 깜빡해서 트랙백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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