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또 신뢰...신뢰, 또 신뢰...

Posted at 2009. 4. 1. 23:49 | Posted in 수령님 정상인모드
"전 단순한 사람이에요. 술, 담배, 여자... 이거 말고는 별로 관심사가 없는지라..."

상당히 자주 하는 이야기다. 문제는 이 셋이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라 겹쳐서 일이 터지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그런 하루 중 하루였으나 좀 큰 하루였다. 지나고 나면 어떤지 모르겠으나 가장 큰 하루였는지도 모르겠다.

요 며칠 몸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몇몇 일로 거의 노숙자처럼 며칠을 지내다가 몸살을 심하게 앓았는데 어제오늘은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때마침 회식이 있었고 몸이 너무 안 좋은지라 평소와 달리 상당히 조심히 술을 마셨다. 새로 오신 부장님 환영회였는데 그러다가 어찌어찌 또 퍼마시게 되었다.

사실 여기서부터 좀 기억이 가물가물한 게 있는데 왠일로 (술로 정신이 반쯤 나간) 맞은 편 회사 아가씨가 한 잔 더 하자는 모종의 제안을 하게 되었고 (역시 술로 정신이 반쯤 나간) 나는 좋다며 그 아가씨 동네까지 가게 되었다. 택시비 이야기에 대해서는 (술로 정신이 반쯤 나간) 맞은 편 회사 아가씨가 어차피 자기가 결제 보니까 상관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고 (역시 술로 정신이 반쯤 나간)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철썩같이 믿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또 무슨 소리를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또 술, 술... 아까 노래방서 노래 한 곡 못 해서 억울하다는 제안에 노래방, 그리고 어차피 곧 지하철 열린다며 또 술, 술... 지금 생각하면 이 아가씨도 참 존경스럽다...

하루 밤을 새고 뭔가를 하는 게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생각같지 않았다. 갑작스레 몸에 심하게 한기가 돌고 눈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결국 회사를 지나쳐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쉰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완전히 퍼져버렸다. 

정신을 차리고도 몸은 마찬가지였다. 그저 몸을 병원으로 끌고 갔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링겔을 맞았는데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회사에 연락을 취한 것은 그제서였다.

당연히 반응은 차가웠고 또 차가웠어야 했다. 공범이 있는지라 둘러댈 여지도 없었고 (그 술로 정신이 반쯤 나간 아가씨도 네 시에야 회사에 나갔다고 한다) 둘러댄다고 또 무엇 하나 달라질 게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자신이 심각하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사님께서 입사 첫 날 술자리에서 오프 더 레코드로 하셨던 이야기 (결국 이렇게 무시하게 되었지만) 가 있다. 처음 회사에 여유가 없을 때 (물론 지금이라고 있지는 않다) 사장님께 자기 월급을 빼서라도 날 넣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할 리 없다만 이사님께서는 자신은 꿈과 열정이 있는 젊은이라면 어떻게든 자신이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가짐을 분명히 피력하셨던 것이다.

우연찮게 조건만 극강인 곳에서 추천이 들어왔을 때 이를 무시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병맛나는 내 사상을 잃으며 긍지를 버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보다도, 누군가가 나를 신뢰해 주었을 때 그것을 져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이야 힘들겠지만 벌 수 있고, 없어도 아낄 수 있지만 신뢰는 힘을 들인다고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일로 신뢰를 꽤 깨끗하게 져버리게 되었다.

어제 (술로 정신이 반쯤 나간) 아가씨가 이야기하길 사실 회사 사람 중에 날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한 명 뿐이었다고 한다. 어제 술로 좀 친해졌으니 이제 한 명 얻고 모두를 잃은 셈이다.

신뢰는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쉽다. 그리고 얻었다가 잃은 것을 다시 얻기는 더욱 어렵다.

메일함을 확인해 보니 직장 대리님으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직장선배로써 오늘 이승환씨의 무단결근으로 인해 직장 선배로써 실망감이 적지 않습니다. (중략)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않습니다. 어떠한 사유로 출근이 어려우면 관리팀 혹은 회사 내 누군가에게 알려야 하는 것은 조직에 속한 사람으로써 갖춰야 할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이승환씨의 무단 결근으로 인해 회사 업무에 지장을 초래한 것은 물론 다른 동료 직원들에게까지 실망감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무단결근 및 연락두절에 대한 조치로 이승환씨는 무단결근에 대한 사유서와 함께 반성문을 작성하여 (중략) 서비스팀 전원에게 이메일로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메일을 준 대리님이 참 감사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조치조차 없었더라면 내일부터의 생활이 더욱 힘든 것은 물론이고 신뢰 회복의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어떤 반성을 보이는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공적 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 특히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 역으로 보일 가능성은 매우 높을 것이다. 질책이 단순한 반성의 요구로 끝나지 않게 신경 써 주신 점,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

생각해보니 공교롭게도 오늘은 수요일, 가장 바쁜 날이었다. 최근 일이 반으로 줄었음에도 수요일만큼은 야근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가 속한 업무는 사람이 그나마 좀 되는 편이고 누구 한 명 없어도 땜빵이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익숙치 않은 일을 접할 경우 그 효율이 떨어짐이야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가장 바쁜 날 이렇게 일이 떨어지면 그 결과야 두말할 필요도 없을 테다.

덕택에 물리적, 심리적으로 고생하게 된 사원분들께 참 미안한 마음뿐이다.
또 한 편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 '어떻게'를 '무엇'으로 풀어나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한다. 공식적인 메일은 따로 작성해 두었으나 블로그에서 깝죽대며 중2병으로 살아가고 있는 오프라인 모습이 참 한심하다는 점도 까발릴 겸, 그리고 반성을 하나의 기록으로 남길 겸 이 곳에도 하나의 글을 남긴다.

ps. 본 글은 만우절 포스팅이 아니며 블로그 특성상 우호적 댓글이 달릴 수 있기에 댓글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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