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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간 (9) 200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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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at 2006. 8. 30. 11:36 | Posted in 야동후후식 영화부

이전 김기덕 감독이 영화 상영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땡깡을 좀 부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최고급 명장 대우 받지만 한국에서는 늘상 찬밥 신세이니까 그럴 법도 하죠. 그 때마다 반김기덕 풍조의 한국 언론은 대중성을 꾀하라는 유치한 충고를 내뱉었는데 이 영화는 마치 김기덕 감독이 언론을 조롱하기 위해 만든 영화인 듯 합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매우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영화이거든요. 비교적 근작인 '활'이나 '빈집'과는 달리 대사도 엄청나게 많고 지나치게 작가주의에 빠져 있는 그런 영화도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제게는 이 영화 전체가 김기덕 감독의 항변처럼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20만명이 들어온다면 한국에서 영화 개봉을 검토하겠다는 말도 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 영화 전국 개봉관이 10개 남짓한 것을 볼 때 이제 김기덕의 영화를 한국에서 보는 것은 좀 미뤄둬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DVD로 들어오거나 최소한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접할 수는 있겠으나 명장이 이렇게 본국에서 묻혀야 하는가에 대해 참으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글은 스포일러가 일부 있으니 되도록이면 극장에 가서 보시길 바랍니다.


얼굴을 다룬 영화는 물론 만화까지도 매우 많습니다. 그렇기에 이 소재 자체를 특이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영화는 다른 얼굴을 다룬 영화와는 진행 방식이 매우 다릅니다. 대개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들은 본의에 의해 얼굴이 바뀌게 된 것이 아니거나 어떠한 요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의로 바꾸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경우는 한 남자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에게 점점 질려가는 남자에게서 사랑 받고자 하는 욕구로 스스로의 얼굴을 고쳐버리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자가 여자에게 지겨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시간의 흐름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해결책이라 여긴 것이죠.


이것이 다른 이유는 전자, 즉 이제껏 일반적인 케이스는 기본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은 얼굴을 바꾼 상태의 삶을 괴로워하며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요. 그러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어떠한 목적 때문에, 혹은 그것을 이룰 수 없는 환경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내부의 갈등을 다룹니다. 그러나
시간에서는 반대로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얼굴을 바꾼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과거 정체성을 버리려 합니다. 여기에서 김기덕 감독은 관객에게는 재미있는,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잔인한 설정을 넣습니다. 남자는 여전히 옛 여자를 잊지 못하고 새롭게 태어난 그녀는 오히려 과거의 자신과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남자를 빼앗으려 하지만 그 시도는 무위에 그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미 얼굴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감은 다시금 남자가 그녀에게 지겨워하는 것으로 귀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갈등 속에서 그녀는 히스테리는 극을 향하고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형태로 발현되어 버립니다.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성형외과 의사를 만나 하소연도 하고 땡깡도 부려 보지만 그것이 해결책이 되지 않음은 남자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남자의 선택은 더욱 끔찍한 선택입니다. 그녀를 정체성의 갈등에 들어서게 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버린 것입니다. 여자는 다시금 자신에게 돌아 올 남자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결국 여자에게 돌아온 것은 예전의 그 남자가 아니라 새로운 남자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욱 혼란에 빠질 뿐입니다. 마치 남자가 예전의 그녀와 새로운 그녀 사이에서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남자가 그러했듯 여자는 과거의 남자만을 좇고 여자가 그러했듯 새로운 남자는 과거의 남자가 아니기에 도망갈 뿐입니다. 그의 빈자리를 매울 수 있는 여자가 새로운 그녀가 아니었듯이 그녀가 좇는 남자는 새로운 그가 아니니까요. 결국 둘의 추격전은 잡는다고 해도 무엇 하나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러한 추격에 불과합니다. 아니, 이미 시간을 거스르려고 하고 시간을 멈추고자 할 때부터 이미 이러한 비극적이고 무의미한 추격은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설사 시간을 멈추게 하고 거슬렀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예전의 그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들이 두려워 한 시간은 어쩌면 유일한 해결책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겨워지는 만큼 또한 잊혀지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시간이니까요.


이 영화는 정말 대단한 영화입니다. 반복하지만 정말 대단한 영화가 나왔습니다. 이제껏 이토록 한 영화에 집중했던 적은 정말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 집중이 깨지는 순간은 모두 김기덕 감독의 천재성을 생각했던 때뿐이었습니다. 김기덕이 괴물 관련 발언을 할 때 표면적으로는 몰라도 속으로는 한국 관객들에 대한 실망이 가득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영화를 본 뒤 김기덕의 실망이 너무나 당연함은 물론
올바르다고 까지 주장하고 싶군요. 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토론토 영화제에 초대된 괴물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언론을 타고 확대재생산 될 때 그 뒤에는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를 평정하고 산세바스찬 영화제 국제비평가 협회상을 비롯해 전세계에서 진짜 이름을 떨친 김기덕 감독이 있었음을 훗날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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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지프스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주말에 보고왔다지요.
    뭐랄까, 그리 좋아하는 영화들은 아닌데 참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면에 있어선 꽤 좋습니다. 김기덕 감독 영화들은 말이지요.
    • 2006.09.03 02:01 [Edit/Del]
      사실 다른 김기덕의 영화는 참 계륵과 같았습니다. 난해하고 재미는 떨어지는 반면 지루함은 주지 않고 많은 생각에 젖게 했거든요. 그에 반하면 시간은 정말 모든 요소를 다 갖춘 것 같아요. 비록 이전만큼의 예술성 (제가 알 수 없는 영역) 은 떨어지더라고 해도요.
  2. 저도 이 영화 보고 싶었는데..개봉관이 많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서도..ㅠㅠ 어디서 보셨는지요?;;
  3. 김기덕 영화는 뭔가 생각하게 해서 좋더군요.
  4. 은하
    꺄악 완벽한 스포일러>_< 근데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김기덕 감독을 보면 "전 세계에서 인정해줘도, 고향에서 박대받으면 그닥 마음이 편치 않는가보다. 대체 인간에게 고향이란 의미는...-_-" 이런 걸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 2006.09.03 02:03 [Edit/Del]
      요즘 같은 세상에 대접 안 해주면 다른 나라로 새는 것은 다반사죠. 좀 다른 경우지만 투자환경이 좋은 나라로 가는 기업도 그렇고 돈 많이 주는 외국으로 가는 학자들도 그렇고요. 하지만 김기덕같은 예능인은 단순히 돈이 아니더라도 인정받고 작업할 환경만 주어진다면 장소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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