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과 금'에 해당되는 글 1건

  1. 최강전설 쿠로사와 (11) 2007.03.07

최강전설 쿠로사와최강전설 쿠로사와

Posted at 2007. 3. 7. 11:34 | Posted in 분서갱유 만화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후쿠모토 노부유키표 만화가 지니는 지향점은 휴머니즘에 있으며 주인공들의 재기는 이 가치에 한없는 힘을 불어넣어 준다. 주인공들은 언제나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상대방, 때로는 자신이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마음이 상황을 더 궁지로 몰아 넣지만 현실적 이익에 반하면서까지,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주인공들은 휴머니즘을 버리지 않는다.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주인공은 인간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으며 재기로 그 상황을 극복해 나가며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치밀한 구성과 심리묘사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최강전설 쿠로사와'는 나를 다소 당황하게 만들었다. 우선 주인공부터 이전과 너무 다르다. 주인공 쿠로사와는 이전 만화의 주인공들처럼 이렇다 할 재기와 능력도 없으며 (힘만 센 공사장 인부) 외모도 시원찮으며 (추남 중의 추남) 인간관계마저도 원활하지 않고 (친구가 없어 인형을 놔두고 술을 마신다) 하다못해 뭔가를 위한 노력조차도 허사로 돌아간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오해만을 낳을 뿐이다) 이전의 주인공들도 하류 인생임에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들은 숨겨진 재능과 강한 의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45세라는 나이는 크다. 이전 주인공들은 적어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었으나 쿠로사와는 능력을 키울 입장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보신조차 힘든 입장이다.

더군다나 쿠로사와는 이전 만화들의 주인공처럼 절박한 상황에 시달리지 않는다. 목숨을 건 도박에 뛰어들 기회도 주어지지 않으며 (도박묵시룩 카이지의 카이지) 살인의 누명을 뒤집어 쓰지도 않으며 (무뢰전 가이의 가이)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지키는 입장에 처하지도 않는다. (은과금의 모리타) 그저 평범하게 일을 하고 술을 마시고 때로는 여자를 낀다. 그가 뭔가 해 보려고 하면 그것은 모두 오해로 점철되는데 이러한 과정은 비극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매우 희극적으로 진행된다. 수영장에서 여자를 쫓아다니다가 여자화장실로 도망가게 된다거나 인분을 뿌리며 레슬러에게 맞서자 레슬러 3인을 꺾었다는 소문이 도는 식이다. 이 때문에 과대평가를 얻기도 하지만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조금도 손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차이는 이전 만화의 주인공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한 채 자연스레 행동한 데 반해 쿠로사와는 당연한 현실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이제껏은 그 주인공들이 아무리 재기 있는 선택을 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매우 당연한 목적이 있었다. 자기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억울한 빚을 탕감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으며 (카이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계속 있을 수 없었기에 탈옥을 꿈꿔야 했으며 (가이) 어둠의 세계로 뛰어든 이상 그 세계 속에서 돈과 목숨을 걸어야 했다. (모리타) 그러나 쿠로사와는 매우 평범한 현실 속에 처해 있으면서도 뭔가 바뀌려 노력한다. 즉 이전 작품의 주인공들은 환경을 바꾸려 노력하는 데 반해 쿠로사와는 자기 자신이 바뀌려 노력한다.

사실 이는 일반적인 경우와 조금 대치된다. 보통 사람은 젊어서는 자신을 바꾸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이 되는 게 대부분이다. 그리고 젊어서는 뭔가를 해내려 해도 대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쿠로사와와 이전 작품들의 경우는 완전히 반대이다. 이전 작품들의 젊은 주인공들은 영웅적인 뭔가를 이뤄내는 데 반해 쿠로사와는 자기 자신을 바꾸려 노력한다. 그렇기에 난 이 만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했다. 나는 아마도 이전처럼 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휴머니즘을 잃지 않고 무언가를 이뤄내는 영웅적인 과거 만화에서 탈피해 극적인 상황도 없고 당연히 영웅이 될 기회도 없는 삶을 그려낼 것이라 생각했다. 영웅적 방식으로 드러내는 휴머니즘이 아닌 희망만을 갖고 계속되는 하류인생을 그려냄으로 역설적으로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만화를 그려내지 않을까 하는 게 나의 추측이었다.

실제로 만화는 계속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역시 그가 추구하는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이제껏 만화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던 만화는 말미에 접어들어 작가가 여전히 휴머니즘을 버리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변함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치이고 그 결과는 매우 다르다. 카이지는 어설픈 휴머니즘과 믿음에 빠져 다시 빈털털이가 되었지만 어쨌든 거액의 빚은 청산했다. 가이도 누명에서 벗어났고 상대방에게 멋지게 복수까지 가한다. 모리타는 그 세계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거물 정치인과 경제인과 관계할 정도로 큰 일들을 해낸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비록 마지막에 영웅적인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공사장 인부이다. 돈도 없고 여자도 없다.

그럼에도 그 역시 다른 주인공들과 달리 목적을 달성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전 주인공들이 추구한 것은 상황의 변화였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내적인 변화'였기 때문이다. 1권의 쿠로사와와 9권 이후의 쿠로사와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불리한 상황은 그저 임기응변적으로 넘기기 일쑤였던 소심한 그는 노숙자들을 괴롭히는 폭주족에게 맞선다.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이득을 안겨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의 정의감에 따라 행동한다. 폭주족들이 '일도 하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는 버러지들'이라고 노숙자를 공격하는 말에 쿠로사와는 '우리도 너희보다 몇 배는 일을 했고 세금도 냈지만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는 그런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라고 (자신은 노숙자가 아님에도) 당당히 대변한다. 심지어 전면전까지도 피하지 않는다.

이 만화가 노부유키의 다른 만화에 비해 심리묘사나 구성 면에서 확실히 떨어진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이 만화가 그의 최고의 작품은 아닐지언정 가장 성숙한 작품이라는 생각은 지우기 힘들다. 이전 만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상수로 두고 현실을 변수로 두었다. 그러나 이 만화에서는 반대로 주인공 자신을 변수로 두며 자신의 변화를 통해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작게나마 변화시켜 나간다. 사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다. 바로 자기 자신이 변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세상을 바꾸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자신을 그대로 두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그대로 두려 해서는 단기적으로는 뭔가 될 것처럼 요란해지기도 하지만 언제나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세상의 변화는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더 나은 자신을 추구하며 변화를 수용할 때 세상 역시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다.

이전 만화의 주인공들처럼 젊어서 절박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고 뭔가를 이뤄낼수도 있다. 카이지도, 가이도, 모리타도 모두 젊어서 악과 맞었으며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은 영웅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은 또 다른 과제를 부여하고 고통을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더 나은 자신을 꿈꾸며 긍지를 갖고 세상과 맞설 것인가, 혹은 언젠가 자신의 한계선을 긋고 현실 속에 안주할 것인가 역시 선택해야 한다. 쿠로사와는 외부적으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음에도 긍지를 잃지 않고 더 나은 자신을 추구함으로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있어 영웅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영웅이라 이야기하는 쪽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인 성과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영웅상인가, 우리는 무엇을 향해 가게 되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만화였다.

'분서갱유 만화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라사와 나오키가 싫은 이유  (28) 2008.10.12
도박묵시룩 카이지의 몰락  (26) 2008.04.13
캡틴 츠바사의 몰락  (27) 2008.03.30
개고양이점프  (11) 2007.06.10
최강전설 쿠로사와  (11) 2007.03.07
세계화에서 살아남기  (0) 2006.04.09
  1. 아앗. 이 만화그림체는!! 우리 꾸꾸가 즐겨보던 이상한 만화 그림체의 도박묵시록 카이지랑 비슷하군요. 크크크
    만화책을 보시고도 이렇게 좋은 글이 나올수가 있다니..대단하십니다. _
    요즘은 이승환님의 블로그에 1등으로 댓글을 달기가 왠지 부끄러워염. 왜그럴까여? ㅇ-ㅇ?
  2. 브라질레이루킥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적 성과를 위한 내면적 목표를 추구하지 않나요?ㅋ

    외부의 환경에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맞추어 가고 있는 것을 보면 가끔 섬득하게 느껴지죠.
    • 2007.03.11 01:38 [Edit/Del]
      네, 환경에 자신을 맞추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내면까지 외부에 이끌려 가는 것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겠지요. 그보다 닉이 참 특이하십니다 -_-;
  3. 처음 댓글 남깁니다. 평이 아주 최고네요. 오늘도 마음의 양식이 되는 글 잘보고 갑니다. ^^
  4. 큰오빠
    글의 내용이 너무 좋네요..^^
    궁금해서 만화책 빌려 볼렵니다~ㅋ
    • 2007.03.19 15:22 [Edit/Del]
      실제 만화는 굉장히 웃깁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식 막판 감동으로의 반전인 코메디일수도 있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볼 때 상당히 진정성은 담겨 있다고 봐요 ^^
  5. 일본 만화를 보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됐지만 볼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은 듭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솨. 함 읽어보겠슴다.
    • 2007.03.19 15:23 [Edit/Del]
      스캔본은 5권까지밖에 없습니다 -_- 일본만화를 보면 아이디어의 끝이 어디인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느끼고 싶다면 박살천사... 나 하레와 구우를 추천합니다...;
  6. 개구리군
    작가가 원고를 그리다가 흘린 눈물때문에 가끔 원고를 망치기도 했다는군요.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니까요.
    주인공은 곧 작가 자신이었다고 합니다.

Name __

Password __

Link (Your Website)

Comment

SECRET | 비밀글로 남기기